02화 그들과 나는 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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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77, 84, 86, 134, 129, 98. 이 숫자들은 내가 매일 일어나자마자 꼭 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 이 일에는 몇 가지 준비물이 필요하다. 바로 스마트폰과 손바닥만한 초록색 통에 넣어 둔 갖가지 도구다. 이 통에는 알콜스왑, 채혈침과 채혈기, 혈당 측정지와 측정기가 들어있는데, 내가 남들과 달리 매일 아침 하는 일은 바로 ‘혈당측정’이다. 가장 먼저 오늘은 어떤 손가락을 찌를지 선택한다. 매일 다른 손가락을 찔러야 덜 아프니까. 그렇게 선택한 한 손가락 끝에 알콜스왑을 살짝 묻혀 소독한다. 그리고 몽땅연필처럼 생긴 채혈기에 채혈침을 넣은 후 손가락 끝에 대고 버튼을 딸깍 누르는데, 그러면 손끝이 따끔, 거리며 조그맣게 피가 맺힌다. 그걸 만보기처럼 생긴 혈당측정기에 측정지를 끼운 후 피를 묻히면 측정기 화면에 혈당수치가 나타난다. 그걸 스마트폰 앱에 기록하는 것, 이것이 1형당뇨인인 나의 매일 루틴이다. 위의 숫자들은 최근 일주일 간의 내 공복혈당으로, 보통 80에서 120 사이가 당뇨인이 달성해야 할 수치다. 지난 일주일은 꽤 만족할 만한 결과다. (그렇지 않은 날도 수두룩한데 말이다.)

삼십 대 중반 쯤에 1형당뇨 판정을 받고 지금은 3년 정도 흘렀다. 처음 1형당뇨인이 되었을 때 나는 식습관과 운동으로 치료가 가능한 2형당뇨와 달리 죽을 때까지 관리해야만 하는 1형당뇨를 더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웹에서 여러 자료를 찾으면서 꽤 신뢰도가 높은 책을 발견했는데, 저자는 일곱 살 때 갑자기 쓰러진 후 30년 넘게 1형당뇨인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책의 목차를 살펴보니 단순한 경험을 넘어 전문의료진도 울고갈만큼 자세한 관리법과 삶에서 부닥치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가 총망라되어 있었다. (물론 전문의료진의 감수와 추천사도 있다.) 그런데 종이책은 절판이다. (아마도 소수의 독자층을 위한 책이고 가격도 5만 원이 훨씬 넘는 고가라 계속 제작할 수 없었나 보다.) 종이책애호가인 나는 무척 안타까웠으나 아쉬운 대로 전자책을 구매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당뇨로부터의 자유>, <춤추는 혈당을 잡아라> 총 두 권인데 제목부터 매우 직관적이다. 제목이 말해주듯 첫 번째 책은 1형당뇨인으로서의 삶에서 오는 여러 가지, 예컨대 주변의 편견과 시선으로부터 자유를 갖기 위해 필요한 마음가짐을 배울 수 있었고, 두 번째 책은 혈당이 오르락내리락하는 폭이 큰 1형당뇨를 관리하는 방법들에 대한 실용서에 가까웠다. 병원에서 교육을 하고 가이드라인을 제공하지만 1형당뇨는 당사자가 아니면 전문의료진이라도 모르는 변수들이 많다. 명확한 이유도 없이 춤추는 혈당은 결국 스스로 관리하면서 얻은 경험칙으로 그 변수를 최소화하는 수밖에 없다.

담당 의사 선생님이 피검사 결과를 알려주던 날, 1형당뇨의 경우 감기를 심하게 앓거나 큰 스트레스를 겪은 후에 갑자기 생기는데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했다. 위의 책에서도 1형당뇨는 2형당뇨와는 달리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작스럽게 췌장이 망가져 생기는 자가면역 질병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어쩌면 내가 1형당뇨인이 된 것은 인스턴트식품이나 고칼로리 음식을 자주 먹는 식습관이 문제가 아닐 지도 몰랐다. (물론 나의 식습관은 좋지 않은 편이었지만 식습관 안 좋은 모든 사람이 당뇨에 걸리는 건 또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몸에 부착하는 연속혈당측정기를 통해 24시간 내내 혈당 추이를 분석하면서 인슐린으로 제대로 조절만 한다면 일반인과 별반 다르지 않게 생활할 수 있다. 일부러 적게 먹거나 특정 음식을 가려 먹지 않아도 되고 혈당만 잘 유지하면 합병증이 걸릴 위험도 없다. 그래서 혈당이 오를 때 인슐린을 잘 맞는 게 중요하다. 나는 매일 혈당을 체크하고 밥을 먹을 때마다 인슐린을 몸에 투여해서 혈당을 적절한 수치로 조절하는 것을 빠르게 습관화했다. 매일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아니라 프리랜서 강사&디지털노마드로 일을 하기에 관리가 더 수월했다. 책에서 당사자가 알려주는 각종 정보들과 관리법, 이 병과 함께 더불어 살아갈 때의 삶에 대한 태도 들을 읽으면서 내가 느꼈던 건 깊은 위로와 함께 ‘아,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라는 것이다. 영화 <굿윌헌팅>에서 숀 선생님이 윌에게 했던 말처럼 “It’s not your fault.”

그러나 사람들에게 당뇨인임을 밝히는 것은 왠지 꺼려졌다. 병에 대한 인식이 없던 때에는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당밍아웃’했지만, 당뇨를 관리하고 깊이 공부할수록 약점이 되리라는 두려움이 앞섰다. 사람들이 내 식습관을 나무라면 어쩌지? 내가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서 게을러서 생긴 병이라고 여기면 어쩌나 싶었다. 나의 걱정을 확인이라도 하듯 ‘1형당뇨 커뮤니티’ 카페에서도 이에 관한 수많은 간증을 발견했다. 자신이 당뇨인임을 밝힌 사람들은 그것이 약점이 되었다고 말했다. “(당뇨인데) 이거 먹어도 돼?”, “얼마나 관리를 안 했으면 당뇨에 걸려?”라는 말들을 매번 듣고, 함께 사는 가족들조차 특히 1형당뇨에 대해 무지했다고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명절에 본 오빠는 나에게 “에휴, 아직 젊은데 어쩌다가 당뇨에 걸리노?”라며 한탄했다. 오빠가 사과도 먹으면 안 되는 것 아니냐고 하자, 나는 “상관 없거든? 나 술도 마시고, 피자, 치킨, 콜라 다 먹는다! 남들이랑 똑같다고.”라고 소리쳤다. 1형당뇨는 2형당뇨와 다르다고 저번에 말했는데도 제대로 이해해주지 않는 오빠가 미웠다. 나는 내가 안전하다고 여긴 몇 사람 외에는 당뇨임을 철저히 숨기고 다녔다. 밖에서 밥을 먹을 때면 화장실에 가서 몰래 인슐린을 맞고, 요즘 특히나 고칼로리 음식이 많다 보니 “이거 먹으면 당뇨 걸리겠다.”라는 말도 어렵지 않게 들었는데도 그럴 때마다 ‘내가 당뇨인이다!’라는 것을 속으로 삼키기만 했다. 내 몸상태를 알아야 하는 치료사나 트레이너에게는 1형당뇨라고 꼭 유형을 붙여 말했다. 나는 그들(2형)과 달라요, 그러니까 나는 내 잘못으로 이 병에 걸린 게 아니에요, 라는 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이런 내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는데, 왜 불편한지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하고 깨달았다. 바로 2형당뇨인은 스스로 잘못으로 당뇨에 걸렸다는 편견이었다. 나에게 내가 1형당뇨인이라는 사실이 그토록 중요했던 건 내 잘못으로 병에 걸린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그래서 2형당뇨인은 잘못이 있다는 것으로 나의 죄책감을 덜었던 것이다. 하지만 2형당뇨인이라도 췌장기능의 복불복으로 걸리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마른 체형이거나 고칼로리 음식을 먹지 않는데도 2형당뇨인 사람을 보았다. 아차, 나는 2형당뇨인과 싸우고 있었구나. 사실은 당뇨를 바라보는 사회의 전반적인 인식과 싸웠어야 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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