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밭으로 둘러싸인 항일 독립운동 거점 사찰, 다솔사 [정용식의 내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헤럴드경제

bet38 아바타



⑯ 경남 사천 다솔사(多率寺)
1500년 전 세워진 천년고찰
한용운이 항일운동 펼친 곳
빼어난 녹차밭 풍경도 유명

정용식의 내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100곳의 사찰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열여섯 번째 방문지는 경상남도 사천에 있는 다솔사입니다.

사천 봉명산 자락에 자리잡은 다솔사 풍경. 뒤에서 보면 푸른 차밭에 둘러싸여 있다. 긴 역사를 자랑하는 천년고찰이다.

‘마지막 한사람까지, 마지막 한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뜻을 마음껏 드러내라.’

3·1 독립선언서 공약삼장(公約三章)중 한 구절이다. 독립선언서에는 종교인 33명이 민족대표로 서명했다. 천도교에서 15인, 기독교에서 16인 그리고 불교에서 2명이 참여했다. 선언서의 기초는 최남선이 맡아 쓰기로 했다. 그런데 불교 측 인사로 참여했던 만해 한용운은 ‘독립운동에 책임질 수 없는 사람이 선언서를 짓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쓰겠다고 나섰다. 독립선언문에 담길 내용은 보다 과감하고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만해는 최남선과 의견 충돌을 빚었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만 독립선언서 말미의 행동강령(공약3장)이 만해의 의견을 수용한 대목이라 전해진다. 이 문구의 초안을 작성했다고 전해지는 곳이 경남 사천에 있는 다솔사의 안심료(安心寮)다.

지난 2021년 6월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열린 ‘만해 한용운 선사 입적 77주기 추모 다례재’ 모습 [연합]

한용운 하면 으레 강원도 백담사와 오세암이 떠오른다. 출가해 깨우침을 얻고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하고 ‘님의 침묵’을 완성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하지만 한반도의 남쪽 끝자락에 있는 다솔사에도 만해선사의 흔적들이 전해오고 있다. 그가 1939년 직접 심은 편백나무가 여전히 잘 자라고 있는 다솔사를 105번째 삼일절 기념식을 앞두고 방문했다.

항일운동과 문학의 산실

만해 한용운이 숙소로 사용했던 건물 안심료

일제 때 한용운 선생이 머무르며 수도했고 소설가 김동리가 ‘등신불(等身佛)’을 쓴 곳으로 알려진 다솔사는 경남 사천 해발 408m, 부드러운 산세의 봉명산(鳳鳴山) 동쪽 자락에 있다. 봉명산은 지리산 영신봉에서 시작해 김해 분성산까지 경남 남해안 200km를 가로지르는 낙동강 남쪽에 위치한 낙남정맥(洛南正脈)의 중간 지점에 있다.

만해선사는 다솔사의 안심료에 머무르며 응진전(應眞殿)에서 수도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독립선언서 공약3장을 작성했고 일제 식민불교에 맞서 불교청년회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비밀결사 ‘만당(卍黨)’을 조직하고 그 본거지로 삼았다. 방문해보니 산속 외진 곳의 절이라 일제의 탄압을 피해 독립운동가, 지식인, 고승들이 모여 계몽운동, 불교정화운동을 도모하기 적당한 곳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해선사는 이곳에서 12년을 은거했다. 단층의 평범한 건물인 안심료 앞에는 ‘국가보훈부 현충시설 〈만당 근거지〉’ 라는 표지판이 보이고 만해선사의 회갑을 기념해 최범술(당시 주지스님, 한용운 제자), 김범부(김동리 친형, 동양철학자) 김법린(불교계 독립운동가), 문영빈(독립운동가) 등과 함께 심었다는 황금공작 편백나무가 잘 자라고 있었다.

안심료 앞마당엔 만해의 회갑을 기념해 심은 편백나무가 우뚝 서 있다.

만해선사는 오세암으로 출가해 백담사에서 법계를 받고 범어사에 들어갔다.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 참여를 주장하는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했다. 1918년 월간지 ‘유심(惟心)’을 발간했고 1926년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내는 등 저항문학 운동에 앞장섰다. 신간회(新幹會)에도 가입해 경성지회장으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1919년 민족대표로 가담해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단 이유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3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풀려난 이후에도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 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7년 항일 비밀결사였던 만당의 배후자로 검거됐다.

​소설가 김동리 선생도 다솔사와 인연이 많다. 1937년부터 1942년까지 다솔사에 머무르며 최범술 주지스님이 세운 광명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 시기 만해선사가 김동리 선생의 결혼식 주례를 서기도 했다.

다솔사의 경내. 만해 한용운 선사, 김동리 소설가 등 역사적 주요 인물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1960년대에는 이곳에서 ‘등신불’을 집필했다. 과거 최범술, 김범부, 한용운이 소신공양(燒身供養)에 관한 대화를 나눴던 기억에서 소설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소신공양이란 ‘스스로의 몸을 살라 부처님께 바치는 것’을 뜻한다. 지난해 자승스님의 입적으로 세간에 알려졌는데, 자살과 살생을 금하는 불교 교리로는 명료하게 설명하기 힘들지만 자신을 던져 치열하게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일 것이라 짐작됐다.

‘등신불’은 사람의 키, 신체와 똑같은 크기의 불상을 말한다. 스님이 입적하고 미라화(化)된 시신에 금박 등을 입혀 그대로 불상으로 만든 것이다. 널리 알려진 등신불은 신라 왕자 출신으로 출가하여 중국 당나라에서 불법을 펴고 백성을 구제하다가 입적한 김교각(金喬覺) 스님의 등신불이다. 김교각은 입적 후 중국에서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았고 전남 보성 대원사엔 ‘김지장보살 성보박물관’이 있다.

[관련 기사] 1500년 백제 사찰에 솟은 티베트 불교의 흔적…천봉산 대원사

https://biz.heraldcorp.com/clean/view.php?ud=20240215050778

풍수지리적 吉地… 묘지로 바뀔 뻔하기도

다솔사의 중심 건물인 적멸보궁

절 이름에 ‘많을 다(多)’와 ‘거느릴 솔(率)’이 들어가는 다솔사는 사찰 입구부터 아름다운 소나무가 많고 풍수지리적으로 보면 대장군이 나오는 터라 한다. 조계종 범어사(梵魚寺)의 말사다.

다솔사에 보관된 ‘곤양 지리산 영악사 중건비’에는 “남쪽 바다에 닿아있는 곤명은 그 진산을 지리산으로 하는데, 수백 리 흘러 곤명 북쪽에 봉우리를 맺은 봉명산에 절을 세웠다. 문창후(文昌侯) 최치원과 지영, 능민 두 스님이 거닐며 즐기던 곳이다. 신라 지증왕 4년(503년)에 절의 역사가 시작됐으며, 이름을 영악사라 했다. 636년 자장법사가 중창하여 다솔사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솔사는 과거 영악사(靈嶽寺), 영봉사(靈鳳寺)로 불리기도 했다. 풍수지리적으로 터가 좋아 유지들이 무덤을 만들려 하자 사찰 스님들이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고 고종이 ‘이 지역에 묘자리를 금지한다’는 표지석을 세웠을 정도였다. 다솔사 인근 소나무숲길에 세워진 ‘어금혈봉표(御禁穴封標)’라는 표지석이 그것이다.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승병 기지 삼아 의병활동을 전개한 곳이어서 호국정신도 깃들어 있는 절이다.

다솔사의 2층 누각 대양루

흥미롭게도 다솔사에는 일주문이나 천왕문은 보이지 않는다. 주차장 우측 갤러리와 불교용품 판매점 건물을 따라가든지 2층 누각 대양루(大陽樓) 앞 계단을 통해 옆길로 가면 곧장 대웅전 앞마당이 나온다.

경내 앞마당에는 정면에 중심 전각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고 대양루 좌우에 요사채와 종무소가 들어서 있다. 적멸보궁 우측으로 돌아가면 부처님을 모시는 가장 높은 성취의 제자들인 16인의 나한과 아라한을 모시는 응진전, 서방정토와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極樂殿)이 있다. 좌측으로 올라가면 산신각과 차밭길로 이어지고, 적멸보궁 뒤편으론 사리탑이 있다. 마당 우측으로는 대양루와 나란히 안심료가 숲길을 내려다보고 있다. 마당을 중심으로 각 전각들이 사방을 두르듯이 배치돼 있다.

적멸보궁에 난 창으로 내다 보이는 사리탑

다솔사는 대양루를 제외하고 1914년의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재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양루는 1749년 건립된 맞배지붕 형태의 2층 누각이다. 앞면 5칸, 측면 4칸에 건평 106평의 다솔사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건물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83호)로 지정돼 있다. 대웅전 역할을 하는 적멸보궁은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다. 밖을 볼 수 있는 큰 유리창이 있고 거기를 통해 뒤쪽의 사리탑이 눈에 들어온다. 유리 밑엔 와불이 누워있다.

1978년 대웅전의 삼존불상을 개금불사(改金佛事, 불상에 금칠을 다시하는 일)할 때 후불탱화 속에서 108개의 사리가 발견됐다. 이를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로 보고 둥근 원형의 사리탑과 적멸보궁 전각을 건립했다. 사리탑 참배 안내표지판은 “연화대 찻(茶)물에 손을 3번 담가 몸을 청정하게 한 후 탑전에 올라 수지 합장 후 사리탑을 세 번 돌며 소원을 기원하면 된다”고 안내하고 있다.

차(茶)나무의 성지

다솔사로 이어지는 숲길

다솔사에는 세 가지의 자랑거리가 있다. 하나는 다솔사에 이르는 초입의 아름다운 숲길이고 둘째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 마지막은 다솔사 주요 전각 뒤쪽 산록을 따라 넓게 펼쳐진 차밭이다.

다솔사 초입의 카페와 식당을 지나면 ‘1500년 고찰 봉명산 다솔사’라는 이정표가 일주문을 대신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울창한 소나무 고목들의 숲길이 펼쳐진다. 계곡을 따라 걸을 수 있는 데크길이 있고 그 옆으로 자동차길이 있어 절 바로 앞까지 갈 수 있다. 명품 소나무 숲길은 산신각 뒤 ‘한용운 스님의 독립 치유의 길’이라고 표시된 녹차밭 산책로까지 쭉 이어져 산책길로 어느 곳에도 뒤지지 않을 빼어나게 아름다운 길이다.

절 뒤편 산비탈을 따라 녹차밭이 펼쳐진다.
녹차밭에는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적멸보궁과 산신각 뒤쪽으로 펼쳐진 드넓은 차밭에서 재배되는 차는 명차로 알려져 있다. 1933년 주지스님이었던 효당(최범술)이 3,300㎡ 크기로 녹차밭을 조성했다고 한다. 효당스님은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으면서 사라져간 한국의 전통 차 문화 복원과 대중화에 힘썼다. 봉명산 아래 자생하는 찻잎으로 ‘봉명죽로차’ 제조법을 만들고 1973년 ‘한국의 차도(茶道)’라는 책을 출간했다.

다솔암에서 봉명산 정상 방향으로 2.3km 올라가면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마애불(磨崖佛)과 보안암 석굴(普安庵 石窟), 부도군(浮屠群) 등이 있다. 보안암 석굴은 고려 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인공 석굴로 경주 석굴암의 형태와 비슷하다고 한다. 석굴 안 석가모니불(본존불)은 코 부분이 깨져 있고 본존불을 중심으로 석불좌상 16구가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다솔암에서 산길로 왕복 두 시간 이상을 걸린다 해서 지름길인 만점마을 안쪽에서 좁은 산길 따라 오르는 루트를 택해 어렵게 찾아갔다. 그러나 보안암 석굴은 구조안전상 위험시설물로 분류돼 있어 출입할 수 없었다. ‘우리 시의 중요문화재로 보전에 동참해 달라’는 취지의 안내문을 보며 아쉬움을 안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글·사진 = ㈜헤럴드 정용식 상무

정리 = 박준규 기자



Tagged in :

bet38 아바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